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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의 역사
1. 상고시대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문헌 중에서, 한의약에 관련된 부분은 원시시대 단군신화에 나타나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한방치료법 중 이미 금기·약물요법 등이 원시주민들의 치료수단으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약물요법은 환웅천왕이 곰과 호랑이를 사람의 몸으로 변하게 하는 수단으로 쑥 한줄기(艾一炷), 마늘 20개(蒜二十枚)를 먹으라고 내려준 것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은 쑥과 마늘이 곰과 호랑이를 사람의 몸으로 변하게 하기 위한 약물이었으며 이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것을 약품 및 식이요법으로 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는 중국의 위·진(魏·晉) 시대로부터 남북조시대 그리고 수·당(隋·唐)에 이르는 시기로서, 중국의 한의학(漢醫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실정에 맞추어 발전을 보게 되었다. 신라는 “약전(藥典)이라는 관아를 두어 의약(醫藥)을 관장했고, 명의가 일본에 초빙되어 일본 왕을 치료해 주는 등의 열학을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한의학을 일본에 전했다. 또한 당시 고구려 및 백제에서 생산되는 많은 약물이 일본과 왕래됨으로써 양국 간의 지식적 교류가 있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일본 의약의 내용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1) 고구려
우리나라에 한의약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서, 삼국 중에서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워 접촉이 용이했던 고구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같은 시기 중국의 한·위 시대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한의서가 수입되기는 고구려 평원왕 3년(서기 361년)에 지총 중국 오나라(吳)의 지총(知聰)이라는 사람이 내외전(內外展)·약서(藥書)·명당도(明堂圖)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에 입국하면서부터이다.
지총이 전한 내외전(內外展)·약서(藥書)·명당도(明堂圖)는 당시 중국에서 중요한 의약서였으며, 고구려는 명의 덕래(德來)를 일본에 파견할 정도로 의약기술이 발전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한의서(韓醫書)들이 고구려 의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는 중국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으리라고 보인다
2) 백제
백제는 중국과의 접촉이 고구려보다는 늦지만, 중국과는 해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고구려를 통한 육지 교통과 해양을 통한 해로 교통이 유리했던 것이 주요인으로서, 중국의 남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다. 백제시대에 저술된 처방서인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에 진나라 저서 내용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에서 당시 제도적으로 “약부(藥部)”라는 의약관서(醫藥官署)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의학박사와 특히 채약사의 관직이 있어 질병치료와 약물채취의 업무를 관장했던 것 등에서 백제의 본초학 발달 정도를 예상할 수 있다. 이때 채약사들의 본초학 지식은 법제(法製) 방법에 대해 기록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백제는 의학·약학을 분립함과 아울러 “백제신집방”을 편찬함으로써 백제 의약의 독창성을 갖고자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유한 의학적인 내용과 중국 의학인 한토의약(漢土醫藥) 그리고 막 수입되기 시작했던 인도의약(印度醫藥)을 융합시켜 발전시키고자 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3) 신라
지리적인 조건으로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불편하여 북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백제를 경유하여 한의학을 수입했다. 초기에는 고구려나 백제의 의방을 간접적으로 전달받았으며, 점차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넓혔으나, 실제적으로는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신라와 중국과의 교류는 원활하지 못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본초습유(신라 경덕왕 12년, 739)”, “해약본초(신라 경덕왕 15년, 759)” 등에 처음으로 신라가 기록되는 것 등에서 유추해보면
신라와 중국과의 교류는 삼국시대 말기인 당 초기에 이르러 차차 왕성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의약보다는 수·당(隋·唐) 시대의 의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의 의학서 “본초습유”, “해약본초” 등과 기타 서적 등에 약물의 산지로 신라가 기록된 점에서 신라의 약재가 중국에 수출되어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산 약재로 중국 문헌에 소개된 약물의 종류로는 인삼, 백부자, 국화, 형개, 위령선 등이 있다. 신라에서 수호증답품(修好贈答品)으로 신라 문헌에 기재된 품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삼이며 그 밖에 우황, 속수자, 노봉방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인삼과 우황은 수량이
많았다. 중국 “가우본초(嘉祐本草)”에는 동해 신라국에서 나는 인삼을 상품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황도 인삼과 같이 외국사절에게 귀증한 증품(贈品)으로 되어 있다. 문헌의 “차물다위(此物多僞)”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에도 고가약(高價藥)은 가짜가 많았음을 알 수 있고, 진품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출입했을을 알 수 있다.
4. 고려시대
고려는 신라 의학을 계승하였으며, 숭불(崇佛) 정책에 따라 인도의학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또한 중국의 같은 시기에 해당하는 송(宋)의 의학지식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상황과는 별도로 국내산 약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원리를 위주로 하는 이론적인 서적이기보다는 임상적인 서적이었다. 즉 향약(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약)을 이용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질병에 직접 적용시킬 수 있는 실증의학, 즉 국내산 약재를 응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겠다는 것을 지표로 삼아 처방서를 엮었다. 고려시대의 특징은 향약에 대한 태동인데 중국의 본초경을 본초학의 원서로 하여 우리나라 고유 향약 본초학에 대한 기틀을 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향약고방(鄕藥古方)”,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등의 서적이 순서대로 출판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시대의 본초학을 전수받는데 그쳤지만 고려 중기 이후에는 고려의 독특한 약물학으로 발전하여 기존의 본초학의 일부분을 형성하며 중국의 “본초경”과 함께 쌍벽을 이루면서 발전해갔다. 이 중에서도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우리나라 최고전(最古典)으로 고종 때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 등이 발행되어 고려 본초학의 융성을 조선에 전하게 된다. 이의 완성이 조선 세종 때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서 이루어진다.
5. 조선시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정무(政務)를 쇄신하였고, 이러한 기틀이 정종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3대의 태종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국내외 사안이 정리됨으로써 이후의 세종 때의 국운융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명(明) 초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중국 의학의 영향권에 머물던 우리나라의 의학은 이때부터 독자적인 의학 발달에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 시기로서, 이후 학설과 의방(醫方)의 체계화 그리고 치료의 보편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1) 조선 초기
당시 상황은 약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이에 맞추어 많은 양의 약재가 명나라 등지에서 수입되었고, 이는 막대한 국비유 출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은 우리나라 고유의 본초학을 발달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즉 고려 시대에 태동했던 향약(鄕藥)의 내용이 정리되는 시기인 것이다. 즉 먼 중국으로부터 높은 값의 약재를 구하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향약 채취와 재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이에 대한 정리를 위하여 다각적인 면에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민간에서는 그동안 사용해왔던 향약과 경험방 등에 대한 활용폭을 높였다. 태조는 각 도에 의학 교육을 담당하는 곳을 설치하는 한편, 채약사(採藥師)를 길러 환자 치료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정종 때 고려 말의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중심으로 “향약제생경험방(鄕藥濟生經驗方)”을 편찬했다. 태종은 종약색(種藥色)이라는 관서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향약의 채집과 씨앗을 기르는 곳을 두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경제적인 문제를 돕도록 하였다. 세종 때 조선시대 향약의 정리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학자들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향약 가운데 약효가 분명하지 않은 약재에 대하여 비교 검토하게 하였고, 향약의 진위 여부를 감별하게 하는 등 향약의 활용에 대하여 노력한 결과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발행하게 된다. 향약집성방이 편찬된 후에도 향약방의 장려와 보급을 위하여 약의 채취시기를 놓치지 않고 약의 건조법을 익히게 했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감초의 종자를 얻어 가꾸어 심는데 성공했으며, 문종 때에는 화단에 심어 가꾸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2) 조선 중기
동의보감 : 광해군 2년(1610) 명의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중종 이후에 명(明) 의학에 의존하고 있었던 분위기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재정리하고 체계화했다. 명실상부했던 한국 한의학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당, 송, 원, 명의 주요 의학 서적과 명나라 이후 출간된 다량의 의학서를 인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향약을 집대성한 의학서를 참고하여 저술되었다. 『동의보감』은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학 내용은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내경편(內景篇)」(6권)·「외형편(外形篇)」(4권)·「잡병편(雜病篇)」(11권)·「탕액편(湯液篇)」(3권)·「침구편(鍼灸篇)」(1권)이다. 우선 이 책은 신체에 관한 내용을 안팎으로 나누어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내경편」에,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 두었다. 신체 관련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병 이론과 구체적인 병 내용은 「잡병편」에 묶였다. 「탕액편」은 가장 주요한 치료수단인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을 실었고, 「침구편」은 또 하나의 치료수단인 침·뜸의 이론과 실재를 다뤘다.
3) 조선 후기
조선의 전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이미 한국의 본초학은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며 발전되었으나, 영조, 정조에 이르러 문화의 부흥과는 반대로 국세 쇠약과 더불어 한의약의 발전도 위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조선 초기의 “향약집성방”이나 중기의 “동의보감”에 견줄만한 조선후 기의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제중신편(濟衆新編)”, “의종손익(醫宗損益)” 등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동의보감 축소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한의학적 지식을 잊지 않기 위한 내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제중신편은 중국 문헌에 우리나라 산의 약재를 새로이 증가시킨 것이 특이사항이며, 모든 약재를 암송에 편리하도록, 약명, 성미, 약효, 포제법 등을 사언사구(四言四句 : 4개단어, 4개문장)로 편성하여 약성가(藥性歌)를 만들어 쉽게 이해되고 기억에 남도록 하였다.
4) 조선 말기
현재까지도 한방의료기관에서 널리 응용하고 있는 한방처방집인 “방약합편(方藥合編)”이 편찬된 시기다. 방약합편(方藥合編) :방약합편은 1885년(고종 22년) 황필수(黃泌秀)가 편찬한 의서(醫書)이다. 황필수는 그의 아버지인 황도연(黃度淵)의 저서 “의방활투(醫方活套)”·“의종손익(醫宗損益)”등을 합하고 용약강령(用藥綱領)과 응급(應急)·금기(禁忌) 등을 첨가하여 이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기존의 의서에 증맥요결(證脈要訣)·용약강령(用藥綱領)·석은보방(石隱補方) 등 10항이 더하여졌다. 이로써 종래에 실용되어 오던 많은 처방들과 약물(藥物)에 대한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처방은 대방(大方)·소방(小方) 등 칠방(七方)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처방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약성가(藥性歌)를 수록하고 있다. 또한 약성에 따라 약물을 나누어 하제(下劑)·토제(吐劑)·한제(汗劑)에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질환의 분류 방법은 “동의보감(東醫寶鑑)”·“제중신편(濟衆新編)”과 비슷하게 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내상(內傷)·허로(虛勞)에서 소아(小兒)까지 처방과 연결하여 배열하였다. 특히 이 책은 간편하고 실용적이며 응급처치에 적절하여 지금까지 한의방의 상비 처방서로 쓰이고 있다.
6. 1900年 ~ 현대
1900년 이후 우리나라 한의학의 대표적인 내용은 아마 사상의학(四象醫學)의 탄생일 것이다. 1900년, 사상의학의 시조인 이제마(李濟馬)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서 사람을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 소양인의 4가지 체질로 분류하여 치료하는 체질의학을 만들었다. 기존 한의학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된다. 즉 모든 치료에 대하여 체질의 적합 여부를 설명함으로써 예방의학적인 차원에서부터 치료의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관점에서의 의학 접근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맞이한 우리나라는 전반적인 면에서 모두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된다. 1930년대에 일본 사람에 의해서 저술된 “화한약고(和漢藥考)”는 현대적인 약물 분류체계를 기준으로 약물에 함유된 성분을 열거하면서 본초학을 정리하였다. 1945년 이전에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한 많은 국산 생약의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대륙과 우리나라 생약의 기원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학자 정태현에 의하여 “조선산야생약용식물”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227종의 약용식물에 대하여 약명, 학명, 산지, 한자명, 약용부위, 채집, 조제법, 보관법, 효능, 대체 약물 등을 상세히 설명했으며, 원형 생약의 사진이 함께 실려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한의약은 잠정적으로 상당 기간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부분적으로 대륙의 영향을 받게된다. 1950년 한국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문화와 서양 의약의 대량 유입을 촉진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한의학은 명맥 유지에 급급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발전보다는 퇴보하는 과정에 있었지만 1951년 국민의료법에 최초로 한의사 제도가 명기되고 한의학의 전문교육기관인 동양의약대학(후에 경희대에 흡수됨)이 설립됨으로써 한의학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시기가 된다.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한의학의 전환점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소위 핑퐁외교라고 불리는 중국 방문에 따른 중의학의 붐에 따라 우리나라 한의학은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신길구의 저서 “신씨본초학(申氏本草學)”을 교재로 한 본초학 교육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본초학과 생약학의 주된 연구 부분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1980~1990년에는 한의학 실정에 맞추어 신민교의 “임상본초학”이 저술되었고, 한의대의 교육을 통일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0년에 전국 한의과대학 본초학 교수가 함께 편찬한 본초학이 저술되었다. 이 공동교재는 현재까지 공동교재로 채택되어 있으며 개정과 증보를 해오고 있다.
이후 전국의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은 본초학의 주된 연구를 담당하게 되는 형태를 띠게 된다. 또한 근래에 들어 국가적으로 의료보험에 한약을 포함시켰으며, 그 준비에 따른 보사부 주도하의 “한약 규격 제정”에 대한 작업이 일차로 진행된 바 있다. 또한 공정서에 수재된 520종에 달하는 한약재에 대하여 구체적인 규격화 작업이 진행 중이며 한약재의 주된 이용자인 한방의료인들이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 한의학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7.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 - 조선 고종 22년(1885)에 일반 백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아래에 두었던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을 알렌이 서양 의술로 치료한 인연으로 고종이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때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12일 뒤 고종은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제중원 운영진과 조선 정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이 조선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제중원은 왕립(국립) 의료기관에서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제중원을 운영하게 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는 늘어나는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병원 확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富豪) ‘세브란스’에게 한국의 의료 및 선교 상황을 전달하고 그를 설득하여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왔다. 같은 해에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되었고 에비슨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숭례문 앞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완공된 건물로 확장 이전하며 병원 이름을 제중원에서 기부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였다. 제중원 의학교 역시 세브란스 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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